“유럽의 해방자는 우리”… 美·러, 나치 제압한 승리 이미지 쟁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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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공동체’ 러·中 밀착 속 2차 대전 종전 80주년
英 “우크라 지지” vs 러 “네오나치 척결” 강조

임명신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5-05-08 16:58:00

▲ 2023년 3월 러시아 방문 당시의 시진핑(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우크라이나전쟁을 통해 밀착하게 됐으나 원래 매우 불편한 사이였다. 지난 1000여년간 한 번도 가까웠던 적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현 국제상황 때문에 서로가 절실해졌다. AP·연합뉴스

▲ 6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 인근에 제2차 세계대전 승리 기념일(전승절) 80주년 맞이 깃발들. 연합뉴스

금년은 제2차 세계대전 종식 80주년이다. 나치가 항복한 날인 ‘전승절’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선 5월8일로, 러시아에선 시차상 9일로 기념한다. 1945년 4월 소련군의 독일 베를린 진입 2주일여 만에 히틀러가 자살하고 항복문서 조인이 5월7일 밤 11시쯤 이뤄져 이튿날 발효했다. 미국의 1944년 6월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주효했으나 이듬해 5월2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제압하면서 전쟁이 완전히 끝났다.

미국 수도 워싱턴DC 중심가의 홀로코스트기념관은 2차 대전을 끝내고 유럽을 구한 해방자가 미국임을 말하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악화일로의 미국·유럽연합(EU) 관계 속에 3월 라파엘 글뤽스만 유럽의회 의원이 프랑스가 미국독립 100주년(1876) 축하선물로 보낸 ‘자유의 여신상’ 반환을 요구하자 백악관 정례 브리핑 때 캐롤라인 레빗 대변인은 “프랑스인들이 지금 독일어를 (공용어로) 안 쓰는 것은 오로지 미국 덕분”이라고 응수한 바 있다. 이 역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노골화된 미국적 자의식의 표출이다.

하지만 2차 대전을 가장 깊이 기억하며 국민통합의 매개로 삼고 있는 게 러시아다. 아예 ‘대조국전쟁’으로 부른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자신들이야말로 대전 승리의 결정적 공헌자임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나치에 맞서 민간인 포함 2400만~2700만 명이 희생된 러시아(당시 소련) 피해가 가장 컸다. 소련시대와 분명한 선을 그으면서도 이 역사 해석만은 확고히 계승 중이다. 참전한 가족·친지 영정 사진을 들고 일반 시민들이 거리를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에 푸틴도 매년 참여한다.

붉은광장 근처엔 주홍색 승리 깃발이 줄지어 펄럭인다. 러시아군과 13개국군, 러시아 무기 시스템이 행진할 행사 준비로 일반인에겐 광장 출입까지 금지됐다. 지난 수년간 러시아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이른바 ‘특별군사작전’ 여파로 전승절 행사를 축소 개최했으나 우크라이나에서 승기를 잡은 터라 달라진 모습이다. 벨라루스·카자흐스탄·쿠바 등 우호국의 일부 정상들만 초대된 작년과 달리 이번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등 29개국 정상이 온다.

13개국 군부대도 붉은광장에서 함께 행진한다. 여기에 북한군은 포함되지 않으며 북한에선 대사급이 열병식에 참석하기로 돼 있다고 앞서 크렘린궁이 밝혔다. 푸틴이 열병식 연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지 주목된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 세력 척결’을 위해 군사행동을 감행했다고 주장해 온 푸틴으로선 성대한 80주년을 빌어 소련의 승리를 우크라이나 상황과 연관지을 가능성이 높다. 네오나치란 혈통·언어적으로 슬라브족과 무관한 친서유럽 지역에서 발흥해 러시아계 주민을 핍박해 온 우크라 강경 세력을 가리킨다.

시 주석은 7일 오후 6시께 전용기로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해 국빈방문 일정을 수행 중이다. 도착 성명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요 강대국이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힘을 합해 제2차 세계대전 승리 결과를 수호하고 유엔과 국제법·질서에 기반한 국제 시스템을 확고히 지키며 패권과 힘의 정치에 단호히 반대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공식 회담 후 공동성명 채택과 기자회견을 마친 두 정상은 일대일 대화를 하며 우크라이나 문제와 러·미 관계 등을 논의했다. ‘시베리아의 힘2’ 가스관 프로젝트를 비롯한 에너지 분야 협력도 회담 의제에 포함됐다.

화상회담(1월)·전화통화(2월)에 이어 올해 들어 세 번째 러·중 정상 간 대화였다. 8월말 9월 초엔 푸틴의 방중이 예정돼 있다. 이날 현지 관영 로시스카야가제타엔 시 주석 명의의 기고문 ‘역사를 거울 삼아 함께 미래를 열다’가 발표됐다. ‘전후 국제 질서 유지에 중·러 협력이 중요하다’는 내용으로 세계질서와 유엔 체제의 수호자 이미지를 적극 내세우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 때문에 중·러의 밀착이 실현된 것이다.

국경선 맞댄 나라들끼리 친하긴 어렵다. 더구나 긴 국경선을 공유한 중·러는 역사상 늘 불편한 사이였다. 네르친스크조약(1689)·아이군조약(1858)·1860년 베이징조약(1860) 모두 제정러시아 측이 영토를 챙겼으며 중국에선 이를 ‘치욕의 역사’ 일부로 기억한다. 1969년 우수리강 전바오다오(다만스키섬) 분쟁에선 무력 충돌도 있었다. 관계 정상화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의 일이다. 시 주석은 ‘운명공동체’ 표현을 자주 쓰지만 중·러에 대해선 ‘상황공동체’라 하는 게 적절하다. 우크라전쟁으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크게 높아졌다.

한편 영국에선 5일 정오 웨스트민스터 시계탑 타종을 기해 나흘간의 전승절 기념주간에 들어갔다. 영국군 1300명이 웨스트민스터 광장에서 버킹엄궁까지 행진했는데 우크라이나군 10여 명도 국기를 들고 행진했다. 19세기부터 러시아와 패권 경쟁을 벌이며 악의적 이미지를 퍼뜨려 온 게 영국이다. 영국발 루소포비아(러시아혐오) 시각이 그간 전 세계 주류 언론을 지배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국내 언론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임명신 기자 imms@skyedaily.com 기자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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