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철 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겨울과 봄이 되면 더욱 치솟을 것이니 백성의 삶(民事)이 걱정입니다.” 사간원 정언(正言) 이명연은 정조 16년(1792) 가을 임금에게 치솟는 물가에 대해 보고했다. 언론 3사 가운데 하나인 사간원은 임금의 말과 행동·정치에 잘못이 있을 경우 지적하는 언론(言論) 역할을 맡았다. 이명연은 문제를 보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결책까지 제시했다. “(물가를) 바로잡을 방법이 없다면 우선 낭비부터 막아야 합니다. 낭비가 가장 심한 건 술집(釀戶)이 으뜸이니 의정부가 금주법을 마련하여 시행하도록 하십시오.”
언론이 지적하자 임금은 고민했다. 정조(1752~1800)는 먼저 사간원의 지적에 동의했다. 그러나 당장 금주법을 시행하도록 하진 않았다. 임금은 “명령만 내려 놓고
금지하지 못하는 것보다 신중히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술을 빚는 걸 금지하는 법이 있는데 따로 조령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조는 관리를 통솔하고 민생을 총괄하는 의정부라도 물가 안정책을
만들 요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금주법을 명령했는데도 술잔치가 벌어지는 상황을 고민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물가 조절과 더불어 백성의 동요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임금의 고민은 관료가 해결했다. 좌의정 채제공(1720~1799)은 정조의 마음을 헤아려 사치스러운
술안주를 금지하자고 제안했다. 푸줏간 고기와 시장 생선이 대부분 술안주로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쌀값이 오르고 술안주를 사치스럽게 차리면 반찬 값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채제공은 “진수성찬을
무절제하게 차린 탓에 반찬 값이 날마다 오르니 엄하게 막아야 합니다”고
아뢰었다. 언론이 사회문제를 지적하면 임금은 신중하게 고민했고 재상이 해결책을 만들었다. 언론과 임금의 민생 토론은 명재상이 정책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가안정은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에게
큰 숙제다. 최근 물가가 치솟고 있다. 특히 사과는 지난해
가을부터 가격이 올랐다. 사과는 아침 식사를 대신하는 끼니이자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이다. 언론은 231년 전 정언이 그랬던 것처럼 “사과 값이 폭등해서 차례상이 걱정된다”고 걱정했다. 사과 농가는 태풍부터 병충해까지
닥친 탓에 울상이었고 국민은 차례상에 올릴 사과 값이 비싸서 난감했다. 사과 값은 폭등했지만 농가 소득은
줄었다는 사실도 문제였다. 해가 바뀌어 겨울이 지나 봄이 되었지만 사과 값은 여전히 비싸다. 국민의 삶과 농가 소득 모두 엉망이 되었다.
정조처럼 대통령도 민생 토론에
집중했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달랐다. 정조가 언론과 허심탄회하게
민생을 의논했다면 윤석열 대통령은 언론을 멀리했다.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던 정조와 달리 윤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조차 열지 않았다. 정부 부처는 해마다 1월이
되면 대통령에게 신년 업무보고를 한다. 대통령은 업무 보고의 이름을 민생 토론회로 바꿨다. 상반기에 412조를 투입해서 내수와 민생을 살리겠다·그린벨트를 풀어서 건설 경기를 띄우겠다·연구개발(R&D) 투자를 대폭 늘리겠다·예산을 투입해서 2024년 새해를 민생 회복의 해로 만들겠다…. 달콤한 대통령 말씀에도
사과 값이 치솟자 민심은 싸늘했고 사과 값도 못 잡으면서 민생 토론을 왜 하느냐는 핀잔이 쏟아졌다.
물가상승으로 민생은 고달프다. 오죽하면 사과 값이 비싸다고 대파 값이 비싸다고 아우성일까. 물가상승으로
비판 여론이 거세자 대통령은 18일 민생을 직접 점검하고자 농협 하나로마트를 찾았다. “저두
시장을 많이 봐봐서”라며
활짝 웃던 대통령은 “대파(가) 875원이면 그냥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생각이 된다”고 말했다. 살림을 맡은 주부는 “대통령이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고 혀를 찼다. 이날 대파 도매가격은 3300원이고 대형마트 판매가격은 4250원이었다. 최고가는 7000원대였는데 하나로마트가 각종 보조금과 정부지원금
등을 포함해서 도매가보다 훨씬 싸게 팔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웃으며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말하니 혀를
찰 만했다.
대통령에겐 현명한 참모도 없었다. 정조의 속마음을 읽었던 채제공과 달리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장바구니 물가 안정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심지어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 국회의원 후보자는 아부성 발언까지 했다. 경기
수원정에 출마한 이수정 후보는 “윤
대통령이 말한 가격은 대파 한 단이 아닌 한 뿌리 값이다”고
말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진은 변명하느라 바빴다. 대통령실은
875원 대파값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더 비쌌다고 해명했다.
채제공은 1758년 도승지로서 사도세자를 폐위하라는 명령에 맞서 죽음을
무릅쓰고 영조를 설득했다. 영조와 정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을 비판하던 채제공과 이명연을 중용했다. 정의를 앞세우며 민생을 살폈던 옛 재상과 달리 대통령 주변 참모들이 대통령 심기만
살피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국민의 한숨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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