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 선수가 금메달을 땄을 때 제 인생도 바뀌었죠. 탁구에 매력에 빠진 이후 모든 것을 쏟아 부었어요”
김경섭(35) 스마트탁구교실 관장은 국가대표 출신 장애인 탁구선수다. 2011년 장애인 아시아선수권에 국가대표 자격으로 출전했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런던올림픽 트레이너로 활약했다. 같은 해 열린 전국 장애인 체육대회에서는 개인·복식 등 2관왕을 차지했다.
김 관장이 처음 탁구에 눈을 뜨게 된 시기는 지난 2004년이다. 당시 아테네 올림픽에서 탁구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유승민 선수는 남자 단식 결승에서 세계랭킹 4위였던 중국의 왕하오를 세트스코어 4대 2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16년 만에 일이었다. 당시 대학교 3학년이었던 김 관장은 유승민 선수의 경기를 보고 탁구의 매력에 빠졌다.
“기존에도 탁구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었어요. 교회 같은 곳에서 조금씩 쳐보기도 했고요. 제가 원래 운동을 좋아하거든요. 하지만 ‘제대로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은 유승민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딴 직후부터 였어요. 곧장 탁구 클럽으로 달려가 전문 교습을 받았죠”
탁구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김 관장은 어느새 탁구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다. 원래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다른 것을 보지 않는 성격 탓에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탁구만 칠 정도로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처음에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어요. 몸 균형을 잡는데 효과적인 운동이기에 시작했던 것이죠. 하지만 탁구를 치다 보니 상대방과 공을 주고받는 느낌, 공 튀기는 소리, 공이 날아가는 궤적 등이 다 좋았어요. 대학교 시절 정말 수업 듣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탁구장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7살 불의의 사고로 잃은 왼팔…“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극복했죠”
탁구를 향한 열정은 눈에 띄는 실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탁구를 처음 배웠던 김 관장은 어느덧 클럽 내 회원들을 하나하나 넘어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실력이 향상되자 새로운 난관에 부딪혔다. 기량이 오름에 따라 고급 기술을 익혀야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장애가 걸림돌로 작용한 것이다.
“허리를 써서 회전을 해야 하는 기술들은 반대쪽 팔의 역할이 중요해요. 회전 시 몸의 균형을 잡아주죠. 하지만 저는 한 팔이 없다 보니 그게 잘 안됐어요. 그러다보니 남들이 3개월 만에 배우는 것을 2~3년에 걸쳐 터득해야 했죠. 생각처럼 몸이 안 따라줘서 답답했어요”
김 관장이 왼팔을 잃는 장애를 가지게 된 계기는 지난 1989년 발생한 사고 때문이다. 당시 7살이었던 김 관장은 부모님과 함께 강원도 화천에서 살고 있었다. 김 관장의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다. 당시 김 관장은 농기구 중 하나인 커터기(여물을 잘게 자르는 기계)에 손이 들어가는 사고를 겪었다.
“그때의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는 않아요. 어떻게 손이 들어가게 됐는지도 기억이 안나죠. 워낙 어렸을 때라 그때는 무슨 의미인지도 잘 몰랐어요. 그때는 왼손잡이였는데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수저를 들 수가 없었던 기억은 나요. 손으로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 조금씩 장애를 실감한 것 같아요”
초등학교, 중학교를 진학하는 과정에서 김 관장은 철없는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당했다. 하지만 김 관장은 타고난 밝은 성격으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별 무리없이 보냈다. 남들과 같이 고득학교, 대학교까지 차례로 졸업했다.
“놀리는 친구들도 물론 있었는데 저는 개의치 않았어요. 주변에 크게 의식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제가 저에게 자신감이 있다 보니 누군가가 나를 다르게 보는 것도 그다지 인식하지 못 했어요”
대학교를 졸업한 김 관장은 계약직 공무원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정보통신 전공을 살려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네이버’에 입사했다. 직장 생활 중에도 그는 한시도 탁구 라켓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회사가 끝나면 탁구를 치러가고 주말이면 시합을 나가고 그랬어요. 업무시간 빼고는 탁구만 쳤는데 그래도 만족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2011년에 과감히 회사를 그만두고 나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했죠”
아시아선수권 대표부터 올림픽 좌절까지…“열정, 책임감으로 버텼어요”
본격적으로 탁구에 뛰어든 김 관장은 이후 많은 시합에 출전하며 점점 실력을 키웠다. 그러다보니 실력을 인정받아 국가대표 상비군, 국가대표 등에 차례로 발탁됐다. 경제 활동이 전무했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이 따랐지만 탁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버텼다.
“탁구를 시작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는 국가대표에 뽑혔을 때에요. 안 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죠. 장애인 탁구에는 체급이 정해져 있는데 제가 속한 체급은 원래 선발 계획에서 제외됐었거든요. 운 좋게도 다시 결정이 바뀌어서 아시아선수권에 제가 출전하게 됐어요. 8강에서 떨어지기는 했지만 출전 자체만으로도 정말 좋았어요”
이듬해 김 관장은 선수 시절 중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된다. 일생일대 목표로 삼았던 2012년 런던 장애인 올림픽 출전이 좌절됐기 때문이다. 올림픽은 체급별로 세계랭킹 제한이 있어 출전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선수가 아닌 트레이너로 이천 선수촌에 입단하게 됐다.
“출전 선수들의 공을 받아주고 함께 연습할수록 선수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커졌어요. 약 8개월 동안 육체적·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어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나’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죠. 심지어 티켓 문제로 런던에 조차 가지 못하게 됐을 때는 진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죠”
당시 그는 맡은 일을 끝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버텼다. 물론 트레이닝 과정을 거치며 새롭게 깨달음도 얻었다. 선수 별로 어떠한 특성이 있는지, 어떻게 코치를 해줘야 하는지를 익히며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김 관장 못지않은 선수들의 열정 또한 그에게 활력소가 됐다.
“휠체어 선수들의 경우 한 여름에 엉덩이가 쓸리고 무를 정도로 노력을 해요. 그 장면을 보고 또 한 번 열정을 키우는 계기가 됐죠. 선수단의 성적도 좋았어요. 탁구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4개, 동메달 4개가 나왔어요”
책임감, 열정으로 버텼던 런던 장애인 올림픽 트레이너 생활은 김 관장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됐다. 당시 그를 눈여겨보고 대전광역시 실업팀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 김 관장은 2013년부터 실업팀 선수 생활을 했고 개인적인 이유로 2015년 선수 생활을 그만뒀다.
지난해부터는 서울 동대문구에 스마트탁구교실을 열어 생활체육탁구발전과 양성에 기여하고 있다.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도 김 관장은 매주 주말마다 선수 자격으로 각종 대회에 참여하고 있다. 실업팀이 아닌 일반인 대회만 참가하며 선수로서의 생활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저는 돈을 크게 벌기보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고 싶어요. 사실 돈이 목표였으면 회사를 그만두지도 않았겠죠.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도 선수로 계속 활동을 하고 싶어요. 제가 가진 한계를 계속해서 넘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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