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에 관한 글을 쓰는 일은 늘 주저하게 된다. 객관성을 자신하기 어려워서다.
내 형제들의 현대사에는 월남전과 광주가 함께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못한 형이 있고, 1980년 5월의 희생도 있다. 월남전과 광주항쟁의 교집합을 한 형제를 두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렵다고 판단 가능하면 말을 아꼈다. 또한 광주의 희생이 더 이상 어느 편의 정치적 자산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재료도 되지 않기를 바랐다.
최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나온 한마디는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유공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이 있는지 우리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으면 좋겠다. 알려야 한다.” 이는 이진숙 의원의 발언이다.
한동안 ‘업적’이라는 단어를 생각했다. 5·18 민주유공자에게 업적이 왜 필요한가.
현행법은 5·18 민주유공자를 어떤 뛰어난 성취를 이룬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법의 목적부터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과 그 유족·가족을 국가가 예우하는 데 있다고 명시한다. 예우의 근거는 ‘업적’이 아니라 희생과 공헌이다.
참전유공자도 다르지 않다. 법은 국가에 ‘공헌하고 헌신한’ 참전유공자를 합당하게 예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우리는 현충원에 가서 묘비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그 사람이 전쟁터에서 어떤 특별한 업적을 남겼는지부터 따지지 않는다.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 갔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묵념의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광주의 희생도 그렇게 바라보면 안 되는 것일까.
물론 유공자 제도와 관련 인정 과정에 잘못이 있었다면 바로잡아야 하고 지원이 적절한지도 따질 수 있다.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 5·18 역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제도를 검증하는 일과 희생자에게 ‘당신은 무슨 업적을 세웠느냐’고 묻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후자의 질문에는 국가가 예우해야 할 희생자가 자신의 희생을 다시 증명해야 한다는 역전된 논리가 숨어 있다. 국가에 의해 죽고 다치고 구금되고 고문을 받은 사람에게 국가가 다시 그 희생의 값어치를 설명하라고 요구하는게 타당한가.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역사적 재조명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는 월남전에서 형이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 알지 못한다. 광주의 희생자도 마찬가지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면 밝혀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다. 그러나 새로 밝힐 진실도 없이 이미 국가가 인정한 희생을 다시 정치의 심판대에 올리는 일은 다른 문제다.
현충원에 누운 참전용사들에게도 일일이 ‘업적’을 물을 생각이 아니라면, 광주의 희생에 다른 잣대를 내밀지 말라. 이미 확인된 희생 앞에서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다.
새로 밝힐 진실이 있다면 밝히시라. 그렇지 않다면, 그냥 묵념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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