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에서 겪은 가혹행위로 불치병을 얻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심각한 좌절감을 맛봤죠. 하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기적처럼 다시 우뚝 일어설 수 있었어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사랑 덕분에 희망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재기할 수 있었죠. 앞으로는 제가 받은 과분한 사랑을 세상에 되돌려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지휘자 겸 성악가 양태갑(남·42) 씨는 자신의 영문이니셜을 딴 ‘TGY아트컴퍼니’를 운영하고 있다. 8년 전 창단한 코랄TGY라는 합창단을 시작으로 TGY오페라단, TGY심포니오케스트라단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11년 중국 투어와 2012년 일본, 말레이시아 공연을 거쳐 지난해에는 싱가폴 나파 예술학교 초청 공연을 하는 등 해외로 무대를 넓혀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중학생 시절 교내 합창대회에서 지휘자를 맡아 수상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그가 정식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이다. 대학 진학 준비를 위해 담임선생님의 제안으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 음악의 매력에 매료된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 공부를 위해 고모가 살고 있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성악가·지휘자 부푼 꿈 안고 미국 유학길…카네기홀 공연 등 ‘승승장구’
부푼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막상 과정은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었지만 언어의 장벽 때문에 중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했다. 피나는 노력을 통해 차츰 미국 생활에 적응해나가기 시작했다. 음악공부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저는 집, 레슨, 학교, 교회 이렇게 4곳만 다니며 살았어요. 교회에서도 성가대 지휘를 맡는 등 음악에 전념했죠. 대학진학에 실패하면 음악을 반대하던 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며 더 열심히 했죠”
그는 미국 명문대줄리어드 음악대학 진학을 목표로 준비했지만 시험 당일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버지니아 쉐넌도어 음악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성악 공부와 함께 합창단에 들어가 지휘 공부를 병행했다.
“어렵사리 대학에 입학했지만 아버지는 만족하지 않으셨어요. 명문대를 원하셨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대학교 3학년 때 유명 음대 테스트를 봤는데 전부 다 합격했어요. 우수한 성적으로 보스턴의 뉴잉글랜드음악원에 들어갔죠. 정말 기뻤어요”
양 지휘자는 대학 내 오페라 단에 들어가려 했지만 인종차별로 결국 실패했다. 다른 학생들보다 능력이 우수했지만 ‘목소리가 너무 크다’ 등의 사소한 이유로 백인 학생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3번의 오디션 끝에 오페라단에 들어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오페라 주인공 역할을 따내기 위해 시도했지만 결국 무산됐죠. 러시아 출신 바리톤이 주인공을 맡았죠. 공연 3일 전에 쫓겨나기까지 했어요. 명백한 인종차별이었죠”
그는 인종차별을 겪으며 좌절감을 느꼈다. 트라우마로 인해 악보를 보면 구토가 나는 등의 휴유증을 겪었지만 담당교사의 응원 덕분에 힘을 얻었다. 대학교 과정을 마치고 뉴잉글랜드음악원 대학원을 진학하며 각종 대회에 참가했다. 오케스트라단을 직접 만들어 지휘 공부도 계속 이어갔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매니저가 생기고 카네기홀 공연, 워싱턴DC 등에서 공연하는 기쁨을 누렸다. 서서히 그의 실력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군 생활 중 가혹행위로 치명적 장애 얻어…주변의 응원 힘입어 좌절 딛고 재기 성공
그는 30살이 되던 해 입대 영장을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국방부 군악대에 입대했다. 그러나 당시의 그의 선택은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켰다. 선임병들의 구타와 가혹행위로 ‘연축성 발성장애’라는 희귀병을 얻게 된 것이다.
‘연축성 발성장애’는 뇌와 성대를 잇는 신경 손상으로 성대 진동이 불규칙해지고 목소리에 떨림이나 끊김이 유발되는 장애다. 성악가로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병은 현재까지도 완치가 불가능한 병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그는 의가사 제대를 했다.
“노래는커녕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너무 많이 울었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저에게 그런 시련이 닥칠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죠. 성악가로서의 데뷔가 눈앞에 있었는데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었어요. 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교수님들께 이메일을 보내며 하버드 메디컬 센터에 신약이 있는지 물어보는 일 밖에 할 수 없었죠”
국내 병원도 전전하며 완치 방법을 찾았지만 방법은 없었다. 의사는 그에게 목을 사용하지 않는 일을 찾아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양 지휘자는 성악을 내려놓고 지휘 공부에 몰두했지만 아쉬움은 가시지 않았다. 양 지휘자는 교회를 찾아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는 나날을 보냈다.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그는 주변의 응원에 힘입어 차츰 용기를 얻어갔다. 목소리를 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러자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한 곡 정도는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자 주변 사람들이 결혼식 축가를 제안했다. 그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한 주변 사람들의 배려였다.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었고 음악인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저의 재활을 옆에서 지켜보던 한 교수님이 서울오페라앙상블에 데리고 갔죠. 그 분의 추천으로 모차르트 오페라 ‘돈 조반니’의 작은 역할을 맡게 됐어요. 좋은 기회를 얻었지만 연습이 가장 큰 문제였죠. 오랫동안 노래를 부를 순 없었어요. 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게 되니 마음이 너무 무거웠죠”
연습을 마치고 병원을 찾았지만 의사 역시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음악을 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 의사의 만류에도 연습을 강행했다. 공연 중에도 1막 후 쉬는 시간에 주변 사람들과 기도를 하며 공연을 무사히 마쳤다.
“물론 아직도 병은 가지고 있어요. 그렇지만 저 스스로 극복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에 노래를 부를 수 있죠”
그는 그동안 주변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시 세상에 되돌려주는 것이 앞으로의 목표라고 밝혔다. 모든 것을 잃은 그가 좌절을 딛고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변의 응원과 관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아원 사업을 하고 싶어요. 물론 혼자 하기는 어렵지만 언젠간 저와 뜻이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미국에서 어린 나이에 혼자 유학생활을 하면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을 느꼈죠. 그 때 부모님을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죠. 고아원을 설립해서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요”
[김민아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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