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중림동 149번지 일원, 이른바 ‘호박마을’ 주민들이 시름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문재인정부의 8·2부동산 대책으로 ‘도시재생 뉴딜정책’ 수혜지에서 제외된 가운데 앞서 주민들을 위한다는 취지로 진행된 서울시의 사업 탓에 오히려 땅값이 올라 ‘삶의 터전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불안감이 감돌고 있다.
‘서울역 뒷동네’로 유명한 호박마을은 고층 빌딩 숲에 둘러싸인 채 1970년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이다. 국내 최초 서양식 벽돌건물인 ‘약현성당’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첫 복도식 주상복합 ‘성요셉아파트’, 조선시대 칠패시장의 맥을 이은 ‘중림시장’ 등이 자리해 역사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서울시는 ‘서울역 일대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을 마련하고 서울역고가를 도보길로 복원한 ‘서울로7017’과 만나는 중림동 일대 50만㎡(약 15만1250평)를 ‘중림동 도시재생활성화계획안’을 발표한 바 있다.
계획안에 따르면 오는 2019년까지 총 178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이곳에는 ‘중림로 보행문화거리’가 조성되는 등 중림동이 보유한 역사문화콘텐츠가 브랜드화 될 예정이다. 이 지역을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탈바꿈시키겠다는 게 서울시의 취지다.
하지만 정작 이곳 주민들은 서울시의 계획안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주민들은 “정부 차원의 재개발이 아닌 서울시의 어설픈 도시재생 때문에 오히려 삶의 터전에서 내몰릴 처지에 놓이게 됐다”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시간이 멈춘 듯 호박넝쿨 무성했던 소박한 서민마을…어설픈 도시재생에 분위기 뒤숭숭
스카이데일리는 호박넝쿨이 무성해 예전부터 ‘호박마을’로 불리던 중림동을 찾았다. 재생사업의 손길은 곳곳에서 느껴졌다. 사용이 중단되면서 흉물로 방치됐던 한 창고는 갤러리로 재탄생했다.
이곳에서는 현재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인 ‘커넥티드 시티’ 프로젝트가 한시적으로 운영 중이다. 오는 12일까지 한국과 영국의 건축가·디자이너·시각예술가 등이 함께 봉제·수제화 공장이 밀집돼 있던 호박마을을 재조명한 작품들을 전시한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정예람(27·여) 씨는 “중림동에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된다는 말을 듣고 도움이 되고자 참여하게 됐다”며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호박마을을 처음 와봤는데 마을 전체가 굉장히 노후하고 허름해 위태롭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정 씨는 “사실 이곳 입주민 대부분은 나이든 노인들이고 건물들마저 낡아 선뜻 찾아올 엄두가 안 나는 곳이다”면서 “그나마 짧게나마 이런 행사라도 개최하니 젊은 층들의 발걸음이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마을을 돕기 위한 서울시와 외부인들의 도움은 정작 주민들에게는 고충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성요셉아파트 상가 내에서 계란 도·소매점을 운영 중인 장석환(26·남) 씨는 “부모님이 30년째 하신 가게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데 상권이 이미 많이 죽었다는 걸 느낀다”며 “생계유지나 하는 정돈데 서울시가 도시재생이다 뭐다 공사한다는 얘기가 들리면서 평소 200만원이었던 임대료가 이제는 400만원으로 뛴 곳도 있다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이곳 주민·상인들 대부분은 계속 살거나 장사를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크다”며 “정작 여기 주민들이 살 수 없다고 하는 상황인데 이게 진정한 의미의 도시재생이 맞는지 의문이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의 말처럼 호박마을 곳곳에는 비싼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은 점포들이 줄지어 있었다.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는 한순남(여·가명) 씨는 “사는 사람이 주는데 단골이 어디 있고 손님이 어디 있냐”며 “시에서 도시재생사업을 한다고 이렇게 들쑤시고 다니면 땅값만 오를 텐데 임대료 오르면 책임은 누가 지냐”고 힐난했다.
이어 “그냥 있는 가게 조금씩 수리해 가면서 오래 장사하고 지내고 싶은데 좁은 마을에 너무 이것저것 사업한다고 하니까 혼이 쏙 빠진다”며 “바깥에서는 부동산시장 잡겠다고 난린데 우리 같이 없는 사람들은 신경도 안 쓰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전반적으로 서울시의 도시재생지원사업이 개발로 인해 원주민들이 이탈하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을 촉발시킨 셈이라는 지적이었다.
서울역일대도시재생지원센터 관계자는 “창고 부지 일대는 거의 흉물로 방치돼 있어 주민들이 없애거나 새롭게 해달라고 요구했다”며 “창고 철거·신축과 관련해서는 계획단계에 있고 허물게 되더라도 공공에서 하는 갤러리·청년창업소 등이 들어서지 일반 근린시설이 입점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상가 임대료가 높아지는 등으로 인근 상인들이 피해보는 일은 없을 거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도시재생뉴딜정책에서 서울시 전역을 투기과열지역으로 묶은 것과는 별개로 중림동 호박마을 도시재생사업은 시에서 자체 운영된다”며 “아무래도 낙후지역 도시재생 사업에 국토교통부 지원을 받으면 예산을 보다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어 정부에 규제 완화를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박원순의 도시재생 공언 그 후…주차단속·노점철거 상인 시름 날로 깊어져
당초 호박마을 일대는 서울역고가 조성 후광을 가장 많이 입을 것으로 기대됐던 곳이다. 박원순 시장 역시 해당 사업으로 인해 중림동을 포함한 공덕동·청파동·서계동 등 서울역 서부지역의 큰 호재를 확신했다.
사업계획을 수립하던 당시 박 시장은 중림동을 찾아 “서울의 관문인 중림동이 개발돼야 서울역 일대 등 전체 도심으로 성장 동력이 퍼질 수 있다”며 “조선시대 때 생긴 국내 최초 어(魚)시장과 가로변 상점뿐 아니라 골목 상점 현대화 사업을 통해 죽은 상권을 살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지금 호박마을 인근 상인들은 서울시의 관심이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다. 특히 매일같이 반복되는 각종 단속에 시름만 깊어진다고 털어놨다. 가로변에서 40년 넘게 채소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박난희(가명·여) 씨는 “예전에는 차 끌고 와서 근처 대놓고 장보고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주차하는 족족 딱지를 떼니까 이제는 사람도 없다”며 “ 상인들 생각 안하고 도시재생이다 뭐다 엉뚱하게 길만 갈아엎고 있다”고 지적했다.
통상 재래시장이 북적거릴 저녁시간이 다 됐지만 호박마을 인근 대로변과 마을 내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산한 모습을 보였다. 20년 넘게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는 정도원(53·남) 씨는 “도시재생은 사실 말도 하기 싫다”며 “여기 상인들은 도시재생을 원하는 게 아닌데 동의도 없이 진행된 거나 다름없다”고 운을 뗐다.
이어 그는 “여기 일대를 살리려면 교통량을 늘려서 유입되는 사람 수를 늘려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서울로 7017 만들면서 근처까지 오는 버스가 다 차단돼 오히려 상권이 초토화됐다”며 “이런 상황에서 도시재생으로 일부 상권이 살아도 걱정이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금도 장사하고 있으면 우릴 동물원 원숭이 보듯 구경하는데 성요셉아파트랑 길 하나 사이에 두고 건너 상가가 살아나면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은 우리를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기기 밖에 더 할까 싶다”며 “다 같이 어울려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무조건 깔끔하게 깨끗하게 만드는 게 도시재생이라고 생각하니 호박마을 주민들은 더 고립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건국대학교 부동산학과 심교언 교수는 “도시재생의 기본 취지는 시민들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는 등 철저하게 시민 중심으로 가야하는 사업인데 중림동 일대 개발은 전반적으로 서울시 그리고 박원순 시장 주도하에 급하게 밀고 나간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심 교수는 “일대 상권에 영향을 끼치는 만큼 보다 면밀하게 분석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상권이 죽어버리는 상황이 빚어졌다”며 “낙후지역 시민들이 살기 좋게 만드는 과정 자체를 도시재생의 일환으로 봐야 하는데 관 주도로 단시간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려고 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그는 “세계적인 흐름에 반영해 도시재생사업을 안이하게 생각하고 뛰어든 부분이 있는데 무작정 철거하고 새로 짓고 도로를 닦고 하는 등의 과정은 이제 지양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부연했다.
[배수람 기자 / 행동이 빠른 신문 ⓒ스카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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