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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국(55) 애견미용학원 원장은 초등학교 졸업 후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할 수 있는 그리 많이 않았다. 남산 인근을 배회하며 ‘아이스케키’를 파는 일을 했었는데, 우연히 충무로 애견전문점을 본 후 애견에 매료됐다. 그 후 동물병원에 취직한 권 원장은 1979년 19살의 나이에 처음 가위를 잡으면서 애견미용을 시작했다. [사진=박미나 기자]ⓒ스카이데일리
“충북 제천의 시골마을에서 자라서 소, 돼지, 염소, 닭, 개 등 동물에 익숙했습니다. 어린 시절 산에서 약초를 캔 돈을 모아 제가 소를 사기도 했습니다. 서울로 먼저 상경한 형이 돈이 필요하다는 말에 아버지는 제 소를 팔아 돈을 마련해 주셨죠.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아 무작정 소를 찾기 위해 가출한 적이 있었죠”
권상권(55) 애견미용학원 원장은 처음부터 애견을 위해서 미용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잃어버린 소를 찾아 서울로 상경했던 기억이 그를 다시 서울로 이끌었던 것이다.
권 원장은 ‘굴뚝이 가장 큰 곳으로 가라’는 부친의 말에 따라 당시 대기업 제과 굴뚝이 즐비했던 양평동에 정착했다. 그가 13세 나이에 처음 접한 돈벌이는 ‘재봉’이었다. 대기업 제과공장 안에 있는 가방공장에서 재봉질을 하기도 했고, 남산 일대를 돌며 ‘아이스케키’를 팔기도 했다.
“아이스케키 대리점 사장님은 제게 왜 매번 아이스케키를 다 녹여 들어 오냐고 물으셨죠. 당시에 충무로에는 3~4개의 애견전문점이 있었는데, 늘 개를 구경하느라 넋 놓고 있다 아이스케키가 녹는 줄도 몰랐던 거죠. 대리점 사장님은 그런 저를 보시고 지인이 하는 동물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주선해 주셨습니다”
당시의 동물병원은 현재의 모습과 달리 나무궤장으로 짜인 통 안에 개들을 보관했다. 배설물 냄새와 개 특유의 냄새가 섞여 악취가 풍겼고, 여름이면 각종 피부병 등 질병과 싸워야 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냄새나는 그곳에서 개똥도 치우고, 밥을 끓여 먹이고, 청소도 하는 등 잡일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다 가위를 잡게 된 게 6년이 훌쩍 지나서였습니다. 1970년대 말 들어서 장모견(털이 긴 개)이 인기를 끌었고, 장모견의 털 관리가 안돼 애견미용을 찾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늘었습니다”
▲ 권 원장은 1979년부터 애견미용업계에 뛰어 든 이후 ‘국내 1호 애견미용사’로 인정받으며 지금까지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국내외에서 열리는 저명한 애견미용행사에서 심사위원으로 위촉받으며 명성을 얻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치와와, 미니어처 핀셔, 퍼그 등 단모견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미용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1979년 즈음 푸들, 요크셔테리어, 시츄, 포메라니안 등 장모견이 인기를 끌면서 해외에서 대량으로 수입됐다.
“애견전문 미용사가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니까 가위와 바리깡을 사서 무작정 잘라주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는데, 개를 만지고 다듬다보니 사람들이 만족했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다 보니 고객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애견미용 체계 없어…고객천대·우여곡절 수차례
관련업체 사람들의 시기·질투도 견뎌내야 했다. 1973년 13살의 나이로 애견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애견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정도로 ‘개박사’가 돼 있었다. 애견미용사로서 권 원장의 권위가 높아지자 일부 사람들은 ‘무자격자’임을 운운하며 그를 수차례 당국에 신고했다.
“이를 계기로 1981년 ‘애견미용사 권상국’이라고 씌인 목간판을 달아 자립했습니다. 당시에는 애견미용사 자격이 없어도 일을 할 수 있었죠.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에서 배워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애견미용실이 생겨나 고객을 다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권 원장의 침체기는 잠시였다. 1년 정도 지나자 고객들은 다시 권 원장을 찾았다. 그동안 인맥을 쌓고 꾸준히 공부했던 것들이 빛을 발한 것이다. 점차 권 원장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났고, 1988년부터는 후학을 양성해냈다.
“고객 중에는 개로 장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10만원 짜리 개를 제게 맡기고, 미용을 하고나면 그들은 그 개를 50만~100만원에 팔았어요. 큰 이득을 취한거죠. 요즘에는 그럴 일이 없지요. 당시 제 미용실이 인기를 끌었고 직원이 한 두 명씩 늘어났는데, 여기저기서 직원들을 빼 가려고 염탐하는 일도 많았죠”

▲ 권 원장은 국내 1호 애견미용사로서 수많은 견제를 받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는 없는 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고, 앞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권 원장은 반려동물 관련 산업이 성장하는 만큼 애견미용 전문학교를 설립하고픈 꿈을 갖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또 다시 경쟁 업체의 견제가 들어왔던 것이다. 후학을 정식으로 배출해 내야겠다는 생각에 1998년 ‘권상국의 애견미용 교육원’이라는 이름으로 교육생을 받았다. 당시 애견의 미용에 관한 ‘학원’법이 없었다. 그는 ‘동물관리학원’이라는 명칭 아래 학원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권상국의 애견미용동물학원’이라는 명칭으로 사용하다 2002년 즈음 ‘동물’이라는 단어를 빼고 국내 최초로 애견미용학원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후 애견미용학원 붐이 일어 국내 300여개까지 들어섰고, 경쟁이 심해져서 제 학원도 휘청했었죠”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원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게 됐습니다. 많은 개들을 둘 곳이 없어 경기도 현리 포도밭을 사 포도밭 기둥에 개들을 묶어 둘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견디고 견뎠습니다. 국가 지원 사업에도 참여하고, 고객들도 다시 유치하는 등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 다시 서울에서 정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애견미용 ‘36년’…세계 각국 누비며 미용 ‘심사위원’ 활동
“애견 미용도 시대에 맞춰서 성장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때는 실력 없는 미용사들이 넘쳐나 일명 ‘빡빡이’로 잘라놓는 게 근 10년 간 유행했었죠. 1990년대에는 기술이 없어 침체기였습니다. 이제는 다양한 애견미용 책자도 발간되고 있습니다. 애견미용사가 빛나는 시대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사고가 있었다. 개의 발은 물론 혀, 생식기까지 다치게 하기도 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난 후에 경험했던 내용을 올바르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그는 바르게만 배운다면 평생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손님들에게 천대를 받으면 직업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할 때도 있었다. 애견미용사의 길을 탈출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봤지만, 그에게는 결국 천직이라고 마음을 굳혔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애견미용에 관한 연구를 거듭해 현재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그는 해외 미용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반려인구가 증가하는 만큼 올바른 반려문화가 정착하길 바랍니다. 추후에는 권상국이라는 이름을 걸고 애견미용 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또 애견미용에 관해서는 스타일미용 책자를 내고 싶기도 하구요. 마지막으로 ‘푸들 브리딩(반려견 훈련의 일종) 전시회’를 열어 좀 더 많은 정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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